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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과 사소문, 사소문 알아보기

by 0927원이 2022. 11. 15.

안녕하세요, 얼마 전 과거 조선시대 사대문(숭례문, 돈의문, 흥인지문, 숙정문)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오늘은 사소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 사대문과 사소문 차이
  • 사소문 종류
  • 사소문 위치

1. 사대문과 사소문 차이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에는 4개의 성벽같은 대문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대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동대문, 남대문 모두 사대문입니다. 이 외에도 성곽을 기준으로 4개의 작은 성문이 있었는데 이를 사소문이라고 합니다. 들어보신 분도 있고, 생소하신 분들도 있는 만큼 자주 보이는 단어들은 아닙니다. 

 

일부 사소문의 경우 한양 도성 내 시신을 운반하는 문으로도 쓰였습니다.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이 오고 가는 사대문에서 같이 시신을 운반하기에는 위생이나 보이기에 썩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사소문 종류

사소문인만큼, 총 4개의 작은 문들입니다. 동소문으로도 불리는 홍화문, 서소문이라고 불리는 소덕문, 수구문이라고 불린 광희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이 있습니다. 

 

홍화문은 혜화문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우리가 잘 아는 혜화동이 연상되며 실제로도 이 근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헤화문은 소문이었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이를 대문처럼 활용했는데요, 한양에서 혜화문을 거쳐 함경도와 황 안도와 같은 북쪽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덕문은 서소문동 근처에 위치하였는데 예종비의 시호가 소덕왕후가 되면서 이후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대표적인 시신을 운반하던 소문으로 이곳 근방에는 조선시대 천주교 순교자들의 순교성지도 있습니다.

 

광희문은 청계천을 비롯한 물의 입구, 즉 수구와 가까웠기에 수구문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도성 내 물이 범람할 때 수구문을 활용하여 수위를 조절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곳 역시 소덕문과 마찬가지로 시신을 운반하는 역할로도 쓰였는데, 소덕문은 서쪽으로 향하는 문이었다면 광희문은 시신을 동쪽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불리우는데요, 북악산 서쪽에 위치하는 문으로 병사들의 출입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열렸을 때는 보통 궁궐의 유지보수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유일하게 창의문은 지금까지도 과거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도 합니다. 

3. 사소문 위치

사소문인만큼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 혜화문은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307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제가 유지보수 어려움을 핑계로 문루를 허물어버리게 되고, 이 사고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매몰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일제는 혜화문의 흔적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렸고, 지금 우리가 보는 혜화문은 1994년에 복원된 모습입니다. 참고로, 실제 혜화문의 원 위치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광희문은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4에 위치합니다.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 하차하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곳이곳 역시 혜화문과 같은 시기에 일제가 강제 철거하였으나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참고로 광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간 시신은 보통 금호동으로 갔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이 죽은 자들이 나가는 문이기도 하다 보니 무당들이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굿을 많이 했다는데, 그래서 신당이 많아져서 근방에 신당동이 위치한다고 합니다. 

 

소덕문은 지금의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서소문동 근방의 천주교 약현성당에는 서소문터에서 순교한 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 역시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경의선 철도를 내기로 하여 철거되었습니다. 아쉽게 소덕문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추정 지역만 남았습니다.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에 위치합니다. 지금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국보이기도 합니다. 유일하게 일제시대 때도 철거당하지 않고 보존된 연유에는 이곳이 워낙 북악산 산기슭에 있다 보니 일제가 철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만, 1958년에 보수를 진행했습니다.